[취재후] “2년 간 근로계약서 19장”…꼼수의 연속

입력 2015.11.12 (06:08) 수정 2015.11.1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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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석 달, 한 달, 한 달, 한 달.'
창원의 한국GM 공장에서 일하는 김 모 씨의 근로계약 기간입니다. 김 씨는 이런 식으로 한국GM 협력업체와 2년간 19장의 근로계약서를 썼습니다. 김 씨의 사례가 특별한 건 아닙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 5백여 명이 대부분 비슷한 실정입니다.

근로계약서 2년간 19장근로계약서 2년간 19장


■ ‘2년간 근로계약서 19장’…정규직 전환율 0.8%
근로자들은 업체 측이 '정규직 전환 책임'을 회피하려고 이런 꼼수를 쓴다고 말합니다. 현행 기간제법상 사용주가 기간제 근로자를 2년 넘게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합니다. 상시적인 일자리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로계약을 수개월 단위로 쪼개면 형식적으로 '2년 연속 근무'가 아닌 게 됩니다.
현장에서 만난 기간제 근로자 김 모 씨는 "연속으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한 달 내외로 공백기를 둬서 나갔다가 재입사를 하는 방식으로 꼼수를 쓴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기간제의 정규직 전환율은 지난 2008년에서 지난해까지 평균 0.8%에 불과했습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기간제법은 사실상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에 실패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입니다. (금재호, '기간제법의 고용 효과에 대한 평가 및 과제', 노동경제학회 추계 정책토론, 국기술교육대학교 HRD대학원 교수)

이렇게 사업주들이 근로계약을 쪼개다 보니 임금도 잘 오르지 않습니다. 호봉제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선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인상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근속연수 1년을 넘기지 못하면 퇴직금도 없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기간제와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임금격차의 37.7%는 근속 기간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금재호, '기간제법의 고용 효과에 대한 평가 및 과제', 노동경제학회 추계 정책토론, 국기술교육대학교 HRD대학원 교수)

기간제 근로자 인터뷰기간제 근로자 인터뷰


■ 기간제 사용기간 늘면 고용 불안 해소될까?
노사정 모두 기간제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을 높여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해법은 판이합니다. 정부는 기간제 사용 기간을 4년으로 늘려야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합니다. 오래 고용할수록 사업주의 정규직 전환 동기가 더 커진다는 겁니다. 일부 근로자들은 근로계약을 쪼개는 관행이 없어지고 최소한 4년이나마 고용이 보장되면 지금보다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만난 대다수 근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기간제 사용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어봤자 불안정한 일자리의 연장일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정규직 전환 의무가 잘 안 지켜지는데 고용 기간이 늘어난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분위기입니다.

"정규직을 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하는 거지 평생 비정규직하려고 비정규직하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2년 (정규직 전환) 법이 있으면 2년 열심히 하면 되든 안 되든 결과가 나오잖아요. 4년으로 늘어나면 4년을 기다려야 하죠. 쉽게 말하면 2년 하다 안 되면 다른 업체 가서 2년을 해 보고 결과를 볼 수 있지만 4년을 해 보고 안 될 땐 4년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예요. 30대 가정이 있거나 애가 있거나 하는 사람들은 이런 거 한두 번 만 하면 40대가 돼요."
- 기간제 근로자 박 모 씨


업체들도 사용기간 연장과 관련 없이 정규직 전환은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재정적 여력이 없는 데다, 중소기업은 주문량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기간제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위해선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간제의 사용 기간 연장 여부에 논의가 매몰돼선 안 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비정규직 4년을 열심히 해서 채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주면 100%는 아니더라도 50% 이상 이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잖아요. 지금 상황은 거의 99%가 안 되니까."
- 기간제 근로자 김 모 씨


용접공 인터뷰용접공 인터뷰


■ 뿌리산업 파견 허용 논란…“임금만 하락” vs “인력난 해소”
기간제법과 함께 노사정의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쟁점이 파견법 개정 여부입니다. 특히, '뿌리산업'에 대한 파견 허용 여부가 핵심 쟁점인데요, 뿌리산업은 용접과 주조, 금형, 열처리, 소성가공 등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산업을 뜻합니다. 정부는 뿌리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파견 근로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뿌리산업 근로자의 56%가 40대 이상일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조주현 “뿌리산업 현황과 정책과제", 「이슈와 논점」, 제904호, 국회입법조사처) 한 주물공장 사장은 "인력 공급이 안 된다"며, "10명 뽑기 위해서 100명 이상이 입사했다가 내일 안 나오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파견 근로가 허용되면 가뜩이나 열악한 근로조건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이 인천의 닻 제조 공장에서 용접공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이들은 대부분 10년 넘게 일하고 있었는데 파견이 허용되면 일자리를 잃고 임금이 줄어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고용주 입장에선 사람 쓰기 쉽잖아요. 아무 데서나 파견 나와서 쓰고 보내면 되는 거니까.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설 자리가 좀 힘들어지지 않겠나. 아무래도 타격이 많다고 봐야죠. 사장으로선 좋겠지만. 파견업체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그쪽에서 고용하는 사람이 수수료 같은 걸 떼어 가겠죠."
- 용접공


■ 노사정, 합의 시한 일주일도 채 안 남아
언론에서 '노동개혁' 이슈를 다룰 때 흔히 등장하는 게 '노동계', '재계'라는 표현입니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노동계과 재계는 각각 이런 입장입니다."하는 식인데요, 여기서 노동계와 재계가 대표하고 있는 노동자와 사업주는 누구일까요?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들은 과연 현장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걸까요?
노사정은 지난달 대타협을 선언하면서 '비정규직 공동 실태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설문 문항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노사정위의 논의 시한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논의를 서두르라는 게 아닙니다. 기간제법과 파견법 개정 문제는 6백만 비정규직의 삶이 달린 문제입니다. 노사정이 각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지혜로운 합의를 도출하길 기대합니다.

[연관 기사]

☞ ‘파견 근로’ 입장차 여전…“임금만 하락” vs “인력난 해소”(2015.11.11)

☞ 기간제 4년 연장도 정규직 전환 도움 안돼(201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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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2년 간 근로계약서 19장”…꼼수의 연속
    • 입력 2015-11-12 06:08:26
    • 수정2015-11-12 09:04:46
    취재후·사건후
'석 달, 석 달, 한 달, 한 달, 한 달.'
창원의 한국GM 공장에서 일하는 김 모 씨의 근로계약 기간입니다. 김 씨는 이런 식으로 한국GM 협력업체와 2년간 19장의 근로계약서를 썼습니다. 김 씨의 사례가 특별한 건 아닙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기간제 근로자 5백여 명이 대부분 비슷한 실정입니다.

근로계약서 2년간 19장


■ ‘2년간 근로계약서 19장’…정규직 전환율 0.8%
근로자들은 업체 측이 '정규직 전환 책임'을 회피하려고 이런 꼼수를 쓴다고 말합니다. 현행 기간제법상 사용주가 기간제 근로자를 2년 넘게 고용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합니다. 상시적인 일자리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근로계약을 수개월 단위로 쪼개면 형식적으로 '2년 연속 근무'가 아닌 게 됩니다.
현장에서 만난 기간제 근로자 김 모 씨는 "연속으로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 한 달 내외로 공백기를 둬서 나갔다가 재입사를 하는 방식으로 꼼수를 쓴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기간제의 정규직 전환율은 지난 2008년에서 지난해까지 평균 0.8%에 불과했습니다.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제정된 기간제법은 사실상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에 실패했다는 게 학계의 분석입니다. (금재호, '기간제법의 고용 효과에 대한 평가 및 과제', 노동경제학회 추계 정책토론, 국기술교육대학교 HRD대학원 교수)

이렇게 사업주들이 근로계약을 쪼개다 보니 임금도 잘 오르지 않습니다. 호봉제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선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인상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근속연수 1년을 넘기지 못하면 퇴직금도 없습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는 이유입니다. 기간제와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의 원인을 분석한 결과, 임금격차의 37.7%는 근속 기간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금재호, '기간제법의 고용 효과에 대한 평가 및 과제', 노동경제학회 추계 정책토론, 국기술교육대학교 HRD대학원 교수)

기간제 근로자 인터뷰


■ 기간제 사용기간 늘면 고용 불안 해소될까?
노사정 모두 기간제 근로자의 정규직 전환율을 높여야 한다는 데는 공감하지만, 해법은 판이합니다. 정부는 기간제 사용 기간을 4년으로 늘려야 정규직 전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합니다. 오래 고용할수록 사업주의 정규직 전환 동기가 더 커진다는 겁니다. 일부 근로자들은 근로계약을 쪼개는 관행이 없어지고 최소한 4년이나마 고용이 보장되면 지금보다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만난 대다수 근로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기간제 사용 기간이 2년에서 4년으로 늘어봤자 불안정한 일자리의 연장일 뿐이라는 겁니다. 지금도 정규직 전환 의무가 잘 안 지켜지는데 고용 기간이 늘어난다고 달라질 게 있겠느냐는 분위기입니다.

"정규직을 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하는 거지 평생 비정규직하려고 비정규직하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2년 (정규직 전환) 법이 있으면 2년 열심히 하면 되든 안 되든 결과가 나오잖아요. 4년으로 늘어나면 4년을 기다려야 하죠. 쉽게 말하면 2년 하다 안 되면 다른 업체 가서 2년을 해 보고 결과를 볼 수 있지만 4년을 해 보고 안 될 땐 4년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예요. 30대 가정이 있거나 애가 있거나 하는 사람들은 이런 거 한두 번 만 하면 40대가 돼요."
- 기간제 근로자 박 모 씨


업체들도 사용기간 연장과 관련 없이 정규직 전환은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재정적 여력이 없는 데다, 중소기업은 주문량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문가들은 기간제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위해선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기간제의 사용 기간 연장 여부에 논의가 매몰돼선 안 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격차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비정규직 4년을 열심히 해서 채우면 정규직이 될 수 있는 법안을 마련해주면 100%는 아니더라도 50% 이상 이런 식으로 하면 사람들이 더 열심히 할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잖아요. 지금 상황은 거의 99%가 안 되니까."
- 기간제 근로자 김 모 씨


용접공 인터뷰


■ 뿌리산업 파견 허용 논란…“임금만 하락” vs “인력난 해소”
기간제법과 함께 노사정의 의견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쟁점이 파견법 개정 여부입니다. 특히, '뿌리산업'에 대한 파견 허용 여부가 핵심 쟁점인데요, 뿌리산업은 용접과 주조, 금형, 열처리, 소성가공 등 제조업의 기반이 되는 산업을 뜻합니다. 정부는 뿌리산업의 인력난 해소를 위해 파견 근로를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뿌리산업 근로자의 56%가 40대 이상일 정도로 고령화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조주현 “뿌리산업 현황과 정책과제", 「이슈와 논점」, 제904호, 국회입법조사처) 한 주물공장 사장은 "인력 공급이 안 된다"며, "10명 뽑기 위해서 100명 이상이 입사했다가 내일 안 나오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파견 근로가 허용되면 가뜩이나 열악한 근로조건이 더 나빠질까 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취재진이 인천의 닻 제조 공장에서 용접공들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이들은 대부분 10년 넘게 일하고 있었는데 파견이 허용되면 일자리를 잃고 임금이 줄어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고용주 입장에선 사람 쓰기 쉽잖아요. 아무 데서나 파견 나와서 쓰고 보내면 되는 거니까.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설 자리가 좀 힘들어지지 않겠나. 아무래도 타격이 많다고 봐야죠. 사장으로선 좋겠지만. 파견업체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그쪽에서 고용하는 사람이 수수료 같은 걸 떼어 가겠죠."
- 용접공


■ 노사정, 합의 시한 일주일도 채 안 남아
언론에서 '노동개혁' 이슈를 다룰 때 흔히 등장하는 게 '노동계', '재계'라는 표현입니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해 노동계과 재계는 각각 이런 입장입니다."하는 식인데요, 여기서 노동계와 재계가 대표하고 있는 노동자와 사업주는 누구일까요? 노사정위원회의 대표자들은 과연 현장의 목소리를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걸까요?
노사정은 지난달 대타협을 선언하면서 '비정규직 공동 실태조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설문 문항조차 만들지 못했습니다. 비정규직 법안에 대한 노사정위의 논의 시한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논의를 서두르라는 게 아닙니다. 기간제법과 파견법 개정 문제는 6백만 비정규직의 삶이 달린 문제입니다. 노사정이 각자의 도그마에 빠지지 말고 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지혜로운 합의를 도출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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